분류 전체보기46 점심 약을 먹었는지 세 사람 모두 기억하지 못했다 “나 오늘 점심 약 먹었나?” 엄마의 질문이 끝났는데도 식탁에서는 아무도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아버지도 나도 서로 얼굴만 바라봤다. 같은 집에 있었고 조금 전까지 함께 점심을 먹었는데도 누구도 엄마가 약을 드시는 순간을 분명히 기억하지 못했다. 엄마는 잠시 생각하다가 “먹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해”라고 하셨다. 나는 식사를 마친 뒤의 장면을 거꾸로 떠올렸다. 엄마가 물을 드셨는지, 약봉지를 뜯는 소리가 들렸는지, 그사이에 내가 부엌에 다녀오지는 않았는지를 하나씩 짚어 봤다. 어느 장면도 확실한 답이 되지 못했다. 아버지도 가끔 외출 준비를 마친 뒤 비슷한 질문을 하신다. “아침 약을 내가 먹었던가?” 매일 같은 시간과 같은 자리에서 약을 드시다 보니 오늘의 장면과 어제의 장면이 섞이는 듯했.. 2026. 7. 23. 곰탕 봉지를 다시 냉장고에 넣으신 이유 처음 달라진 것은 냉장고 안이 아니라 엄마가 음식을 바라보는 표정이었다. 예전에는 저녁 메뉴를 고르던 시간이었는데, 내과를 다녀온 뒤에는 무엇을 먹을 수 있는지부터 묻게 됐다. 같은 식탁인데도 식사를 준비하는 분위기가 조금 달라졌다. 의사는 신장 기능이 좋지 않으니 홍삼이나 한약, 건강기능식품을 함부로 드시지 말고 진하게 끓인 곰탕도 자주 먹지 않는 편이 좋다고 설명했다고 한다. 신장 기능이 계속 떨어지면 나중에 투석 치료가 필요할 수도 있다는 말도 들으셨다. 엄마에게 오래 남은 것은 곰탕이나 건강기능식품 이야기가 아니었다. 몸이 붓거나 숨이 찬 것도 아닌데 투석이라는 말까지 들었다며 자신의 상태가 생각보다 심한 것 아니냐고 몇 번이나 물으셨다. 평소 좋아하던 국을 앞에 두고도 숟가락을 바로 들지 못하셨.. 2026. 7. 22. 올여름 부모님 외출 가방에 새로 들어간 것들 부모님이 시장에서 돌아오신 날이면 현관 바닥에 가방 속 물건이 하나씩 놓였다. 물이 남은 텀블러, 땀에 젖은 손수건, 비닐봉지 안에 접힌 쿨타월, 사용하지 않은 예비 마스크가 차례로 나왔다. 같은 가방을 들고나갔어도 돌아온 모습은 날마다 달랐다. 어떤 날에는 텀블러의 얼음이 거의 그대로였고, 어떤 날에는 물이 바닥에 조금만 남아 있었다. 쿨타월을 꺼내지 않은 날도 있었고, 물기를 짜지 못한 채 비닐봉지 안에 넣어 온 날도 있었다. 부모님에게 어디까지 다녀오셨는지 묻기 전에 가방을 열어 보면 그날 더위와 외출 시간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되는 날이 있었다. 돌아온 텀블러에 물이 그대로 남아 있던 날아버지는 날씨가 더워도 하루 종일 집에 있으면 몸이 더 무거워진다고 하신다. 가까운 곳이라도 걷고 와야 마음이 .. 2026. 7. 21. 흑채를 고집하던 아버지가 가발을 쓰기까지 몇 년 동안 아버지 방 한쪽에는 열리지 않는 가발 상자가 놓여 있었다. 돈을 주고 맞춘 물건이었지만 아버지는 집 안에서 몇 번 써 본 뒤 다시 꺼내지 않으셨다. 상자 위에는 다른 물건이 하나씩 쌓였고, 가족도 어느 순간부터 가발 이야기를 먼저 꺼내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버지가 탈모를 신경 쓰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외출하는 아침이면 거울 앞에 앉아 고개를 조금 숙이셨고, 엄마는 뒤에서 정수리의 빈 부분을 살피며 흑채를 뿌려 드렸다. 검은 가루가 옷에 떨어지지 않도록 어깨에는 수건을 둘렀고, 마지막에는 흩날리지 않게 스프레이도 사용했다. 흑채를 쓰는 일은 번거로웠지만 아버지에게는 익숙했다. 흑채는 머리보다 평소 모습을 지켜 주었다아버지는 뒷머리와 옆머리에는 모발이 많은 편이었지만 정수리부터 조금씩 비어 .. 2026. 7. 20. 치과에 가면 임플란트보다 중요한 말이 있었다 치과 접수대에서 문진표를 받은 아버지는 치아가 불편한 곳을 적는 칸보다 수술 이력을 묻는 항목부터 찾으셨다. 작은 글씨를 손가락으로 짚어 내려가다가 ‘수술 경험’이라는 문장이 보이자 펜을 멈추셨다. “양쪽 무릎 인공관절이라고 쓰면 되지?” 그날은 임플란트가 흔들리거나 잇몸이 아파서 찾아간 것이 아니었다. 몇 년 전에 심은 임플란트와 주변 잇몸 상태를 확인하는 정기 검진일이었다. 아버지는 무릎 수술을 받은 연도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며 나에게 다시 물으셨다. 나는 휴대전화에 적어 둔 진료 기록을 확인했고, 아버지는 문진표에 양쪽 무릎 인공관절 수술 시기를 적으셨다. 복용 중인 약을 묻는 칸에서는 가져온 약봉투도 다시 꺼내 보셨다. 문진표에는 무릎 수술 시기와 복용약도 적었다치과 진료에는 눈으로 상태를 확.. 2026. 7. 19. 1인실로 옮기자 잠과 말동무가 서로 다른 문제가 됐다 수술 다음 날 아버지 침대 옆에는 보행기보다 호출벨이 더 가까이 놓여 있었다. 물을 마시거나 식사하는 일은 혼자 하실 수 있었지만,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려면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다. 수술한 다리를 바닥으로 내리는 순간 몸이 한쪽으로 기울었고, 화장실까지 몇 걸음 옮기는 일도 혼자 시도하기에는 불안해 보였다. 우리 가족은 입원 전에 1인실이 다인실보다 당연히 편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이전 수술 때도 주로 1인실을 이용하셨다. 다른 환자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고, 불을 끄는 시간과 텔레비전 채널도 마음대로 정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무릎 인공관절 수술 직후에는 조용한 방보다 먼저 필요한 것이 있었다. 엄마와 내가 병실에 없는 시간에도 아버지가 혼자 무리해서 일어나지 않아도 되는 환경.. 2026. 7. 18. 이전 1 2 3 4 5 6 7 8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