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탁을 치우고 있는데 엄마가 약봉지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손을 멈추셨다. “나 오늘 점심 약 먹었나?” 바로 옆에 있던 나도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식사를 마친 뒤 잠깐 텔레비전을 보고 다른 이야기를 나눈 터라 엄마가 약을 드시는 모습을 분명히 봤는지 기억이 흐릿했다. 엄마는 식탁에 남은 약봉지를 하나씩 만져 보셨다. 봉지 안에 약이 들어 있는지는 알 수 있었지만, 그것이 오늘 점심 약인지 전날 남은 약인지는 바로 구분하기 어려웠다. 아버지도 가끔 비슷한 질문을 하신다. 아침과 저녁에 약을 드시는데 전화 통화를 하거나 외출 준비를 하다 보면 “내가 아까 먹었던가?” 하고 물으신다. 처음에는 매일 비슷한 시간에 하는 일인데 왜 기억하지 못하실까 싶었다. 그러나 같은 행동이 날마다 반복되면 오늘의 장면이 어제의 장면과 비슷해져 서로 섞일 수 있었다. 하루에 여러 번 약을 먹고 안약까지 사용하면 보호자도 어느 것까지 했는지 헷갈릴 수 있다. 나조차 바로 옆에서 보고도 확실하게 대답하지 못하는 날이 있었기 때문이다.
요일별 약통이 우리 집과 맞지 않았던 이유
약을 드셨는지 헷갈리는 일을 줄이려고 가장 먼저 구입한 것은 요일별 약통이었다.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칸이 나뉘어 있어 빈칸만 보면 복용 여부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식탁 위에 반듯하게 놓인 약통을 보며 이제 걱정할 일이 줄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엄마는 뚜껑을 몇 번 열어 보시더니 번거롭다고 하셨다. “약국에서 한 번 먹을 만큼씩 봉지에 다 넣어 줬는데, 이걸 왜 또 꺼내서 옮겨 담아야 하니?” 듣고 보니 엄마 말도 맞았다. 부모님이 처방받은 약은 대부분 아침, 점심, 저녁에 먹을 양이 작은 봉지에 이미 나뉘어 있었다. 그 약을 다시 꺼내 약통에 넣는 일은 편리한 관리법이 아니라 새로운 집안일처럼 느껴졌다. 약을 옮기다 바닥에 떨어뜨릴 수도 있었고, 아침 약과 저녁 약을 다른 칸에 넣을 가능성도 있었다. 여러 약병에서 알약을 하나씩 꺼내 드시는 분에게는 요일별 약통이 잘 맞을 수 있지만, 이미 1회 복용량으로 포장된 약을 드시는 부모님에게는 오히려 단계가 하나 더 늘어났다. 아버지도 며칠 사용한 뒤에는 원래의 약봉지를 다시 찾으셨다. 약통을 샀으니 계속 사용해야 한다고 고집하기보다, 두 분이 평소 하던 방식 안에서 덜 헷갈릴 방법을 찾는 편이 나았다.
안약은 엄마에게 휴지 한 장이 더 잘 맞았다
엄마는 알약뿐 아니라 안구건조증 안약과 염증 안약도 사용하신다. 두 안약은 처방받은 순서와 시간 간격에 맞춰 넣고 계셨지만, 알약보다 안약을 넣었는지가 더 자주 헷갈렸다. 건조증 안약을 넣은 뒤 텔레비전을 보거나 부엌에 다녀오면 엄마는 어느 단계까지 했는지 다시 생각하셨다. “건조증 약은 넣은 것 같은데, 염증 약도 넣었나?” 처음에는 사용한 안약병을 왼쪽으로 옮겨 놓기로 했다. 하지만 엄마는 안약을 넣고 나면 익숙한 자리로 다시 돌려놓으셨다. 병의 위치만 보고는 어느 안약까지 사용했는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가 안약을 넣고 눈가로 흐른 액을 휴지로 닦는 모습을 보았다. 그 휴지를 바로 버리지 않고 잠시 남겨 두면 어느 단계까지 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건조증 안약을 넣은 뒤 사용한 휴지 한 장을 안약 옆에 두었다. 정해진 시간이 지나 두 번째 안약을 넣을 때는 새 휴지를 사용했다. 휴지가 한 장이면 첫 번째 안약까지, 두 장이면 두 종류를 모두 사용한 것으로 알아볼 수 있었다. 두 번째 안약까지 넣고 나면 휴지는 모두 버렸다. 안약의 순서와 간격은 임의로 정한 것이 아니라 처방받은 방법을 그대로 따랐다. 휴지는 복용법을 바꾸는 도구가 아니라 엄마가 방금 한 행동을 눈으로 알아볼 수 있게 남겨 두는 표시였다. 처음에 엄마는 “다 쓴 휴지를 왜 안 버리고 놔두느냐”며 웃으셨다. 며칠 지나자 기억을 억지로 되살리는 것보다 눈앞에 놓인 휴지를 보는 편이 편하다고 하셨다. 요즘은 안약을 넣다가 헷갈리면 나를 먼저 부르기보다 안약 옆부터 살펴보신다.
약봉지 날짜는 아버지에게 더 빨랐다
아버지에게는 휴지보다 숫자가 잘 맞았다. 약국에서 받아 온 약봉지 앞면에 네임펜으로 날짜를 적기 시작했다. 엄마 약은 한 달치, 아버지 약은 두 달치 정도를 받아 오기 때문에 20, 21, 22처럼 날짜 숫자만 차례대로 써 두었다. 정성스럽게 적을 필요는 없었다. 두 분이 알아볼 수 있을 정도면 충분했다. 은박 포장으로 된 약에는 네임펜의 가는 부분을 이용해 칸마다 날짜를 표시했다. 아버지는 오늘 날짜가 적힌 약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을 보면 “그럼 아직 안 먹은 거네”라고 하며 약을 챙기셨다. 약을 다른 통으로 옮기지 않아도 평소 사용하던 포장에 숫자 하나를 남기는 것만으로 확인이 쉬워졌다.

다만 날짜가 적힌 약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만으로 이미 복용했다고 단정하지는 않았다. 약봉지가 다른 곳으로 옮겨졌거나 미리 뜯어졌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숫자는 아버지의 기억을 대신하는 답이 아니라, 남아 있는 약을 더 빨리 알아보게 하는 표시였다.
약을 먹었는지 헷갈릴 때 한 번 더 먹어도 될까
휴지와 날짜 표시가 잘 맞는 날도 있었지만 모든 상황을 완벽하게 해결해 주지는 않았다. 날짜를 적지 못한 약봉지가 섞이거나, 미리 포장을 뜯어 둔 날에는 복용 여부를 확인하기 어려웠다. 예전에는 약을 드셨는지 확실하지 않으면 “하루쯤 안 먹어도 괜찮겠지”라며 넘어가려고 하셨다. 반대로 먹지 않은 것 같다는 이유로 한 번 더 복용하려는 날도 있었다. 나 역시 약을 거르면 증상이 나빠질까 걱정됐지만, 기억이 나지 않는 상태에서 다시 드시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약을 먹었는지 기억나지 않을 때의 대처는 약의 종류와 복용 시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복용 시간이 지나 뒤늦게 생각났을 때 바로 먹도록 안내되는 약도 있고, 다음 복용 시간이 가까우면 건너뛰도록 안내되는 약도 있다. 모든 약에 같은 기준을 적용하기 어려운 이유다. 그래서 복용 여부가 불확실할 때는 먹지 않은 것 같다는 느낌만으로 약을 한 번 더 드시게 하지 않았다. 약봉지와 처방 안내문에 적힌 복용법을 먼저 보고, 판단하기 어렵다면 처방받은 병원이나 약국에 문의하는 편이 안전하다. 놓친 약을 보충하려고 다음번에 두 배로 복용하는 것도 피해야 한다. 문의할 때는 원래 약을 먹는 시간과 마지막으로 확실하게 복용한 시간, 현재 남아 있는 약을 함께 알려 주면 도움이 된다. 약 이름을 기억하지 못해도 약봉지를 손에 들고 전화하면 처방 내용을 확인하기가 수월하다.
보호자가 대신 기억하기보다 각자 알아볼 표시를 찾았다
처음에는 내가 부모님의 약 복용 장면을 모두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하루 종일 곁에서 지켜볼 수도 없었고, 함께 식사를 했어도 약을 드시는 순간을 놓치는 날이 있었다. 엄마에게 맞는 것은 안약 옆에 잠시 남겨 둔 휴지였고, 아버지에게 맞는 것은 약봉지에 적힌 날짜였다. 같은 집에서 같은 문제를 겪어도 두 사람에게 편한 방식은 달랐다. 복용해야 하는 시간과 약의 종류가 많은 사람에게는 요일별 약통이나 복약 알람이 더 잘 맞을 수 있다. 스스로 약을 관리하기 어려운 경우에는 보호자가 함께 살피거나 의료진과 약사에게 관리 방법을 상의해야 할 수도 있다. 반면 이미 한 번 먹을 양만큼 나뉘어 포장된 약을 드시는 부모님에게는 약을 다시 옮겨 담는 것보다 기존 포장에 작은 표시를 더하는 편이 간단했다. 유명한 관리 도구보다 실제로 사용하는 사람이 번거롭지 않게 이어 갈 수 있는지가 더 중요했다.
우리 집에는 약을 기억하는 흔적이 남았다
저녁이 되면 나는 식탁 위에 남은 빈 약봉지를 치운다. 엄마는 안약 옆에 놓아둔 휴지 두 장을 접어 쓰레기통에 버리신다. 아버지는 다음 날 날짜가 적힌 약봉지를 식탁 가까이에 꺼내 놓으신다. 약을 드셨는지 묻는 말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질문이 나오더라도 서로의 기억부터 확인하지는 않는다. 엄마는 안약 옆에 남아있는 휴지를 한 번 확인하고, 아버지는 약봉지의 날짜를 살펴본 뒤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