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46 기억을 확인하는 질문이 대화를 막고 있었다 엄마가 친구에게 들은 이야기를 꺼내신 것은 저녁 설거지를 시작하려던 때였다. 친구의 아들이 어디로 여행을 갔고,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다는 내용이었다. 엄마가 두 번째 문장을 이어 가기도 전에 나는 고무장갑을 끼던 손을 멈췄다. “그 이야기 며칠 전에 하셨어요.” 엄마는 잠시 입을 다무셨다. 내가 언제 들었는지까지 말하자 엄마는 고개를 조금 갸웃하셨다. “내가 너한테 말했나?” 얼마 전에는 유튜브에서 본 연예인의 일상 이야기를 두 번 들은 적도 있었다. 처음 들었을 때는 함께 웃었지만 같은 내용이 다시 나오자 나는 대화를 끝까지 듣지 않았다. 하루 종일 유튜브를 틀어 놓으니 내용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 아니냐고 했다. 그렇게 계속 보면 멍해질 수 있다며, 이러다 치매라도 오면 어떻게 하느냐는 말까지 덧붙.. 2026. 8. 3. 같은 귀에서 잰 체온이 자꾸 달라졌다 점심을 드신 엄마는 선풍기 바람이 직접 닿지 않도록 의자를 옆으로 조금 옮기셨다. 에어컨은 켜져 있었지만 거실 공기가 차갑지는 않았다. 엄마는 소파에 기대어 텔레비전을 보다가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눌렀다. “오늘도 머리가 조금 아프네.” 나는 엄마의 이마에 손을 올려 보았다. 뜨겁다는 느낌은 없었다. 열은 없는 것 같으니 조금 쉬면 괜찮을 것 같다고 말씀드렸지만, 엄마는 서랍에서 귀에 대는 자동 체온계를 꺼내셨다. 처음에는 체온계 끝을 귀 입구에 살짝 대고 버튼을 눌렀다. 숫자를 확인한 뒤에는 체온계를 조금 더 안쪽으로 향하게 해 다시 재셨다. 두 번째에 표시된 체온이 훨씬 높게 나오자 엄마의 표정도 달라졌다. 같은 시간에 같은 귀에서 잰 체온인데 숫자는 일정하지 않았다. 한 번 더 재면 내려갈 것 같다.. 2026. 8. 2. 접수창구에서 휴대전화만 들고 멈춰 섰다 대기표가 한 칸 앞으로 움직였을 때 엄마는 외투 주머니에 손을 넣으셨다. 접수창구까지 두 사람만 남아 있었다. 나는 진료 예약 문자를 다시 열어 날짜와 시간을 확인했고, 엄마는 휴대전화 지갑과 작은 카드지갑을 번갈아 들여다보셨다. “주민등록증은 어디에 넣으셨어요?” 엄마는 카드 사이를 한 장씩 벌려 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집에 두고 왔나 보다.” 우리 차례가 되자 직원은 엄마의 이름과 생년월일을 확인한 뒤 신분증을 보여 달라고 했다. 나는 엄마의 휴대전화를 받아 사진첩을 열었다. 예전에 혹시 잃어버릴까 봐 찍어 둔 주민등록증 사진이 있었다. 화면을 밝게 키워 직원에게 보여 드렸지만, 촬영한 사진은 본인확인 수단으로 사용할 수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뒤에는 접수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서 있었고, 엄마는 창.. 2026. 7. 27. 아침 혈압과 병원 혈압 사이에 빠진 시간이 있었다 아침 식사를 준비하던 엄마가 식탁 한쪽에 놓인 혈압계를 앞으로 끌어당기셨다. 아버지는 아직 방에서 나오지 않았고, 주전자에서는 물이 끓기 시작했다. 엄마는 의자에 앉아 잠시 기다린 뒤 왼팔에 커프를 둘렀다. 버튼을 누르고 기계가 팔을 조이는 동안에는 말하지 않았다. 숫자가 나타나자 엄마는 작은 수첩을 펼쳐 날짜 옆에 그대로 적었다. 전날 아침과 크게 다르지 않은 수치였다. 잠시 뒤 나온 아버지도 같은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의자에 앉자마자 혈압계를 찾지는 않았다. 화장실을 다녀오고 물을 한 모금 마신 뒤 등을 등받이에 기대고 기다렸다. 예전에는 아버지가 “이 정도면 됐지” 하며 바로 버튼부터 눌렀지만, 요즘은 식탁 위 시계를 한 번 보고 팔을 올렸다. 집에서 재는 부모님의 혈압은 매일 완전히 같지는 않았.. 2026. 7. 26. 비슷한 사진이 많을수록 병명은 더 멀어졌다 휴대전화 사진을 정리하다가 엄마 목을 찍은 사진이 여러 장 연달아 나왔다. 같은 자리를 찍었는데도 어떤 사진에서는 돌기가 붉게 보였고, 다른 사진에서는 주변 피부와 비슷한 색으로 보였다. 목을 조금 돌린 사진에서는 더 튀어나온 것처럼 보였고, 창가에서 찍은 사진에서는 생각보다 작아 보였다. 엄마는 화면을 넘겨 보다가 “사진마다 왜 이렇게 다르게 보이니?” 하고 물으셨다. 나도 바로 설명하기 어려웠다. 사진을 찍은 날짜와 위치는 같았지만 조명과 각도, 옷깃이 닿은 상태가 달랐다. 처음 발견했을 때 돌기는 목 옆에 좁쌀보다 조금 큰 크기로 튀어나와 있었다. 통증이나 가려움은 없었고 피가 나거나 진물이 흐르지도 않았다. 아버지는 살젖처럼 보인다고 말씀하셨다. 엄마는 아프지 않으니 그냥 두자고 하셨지만, 거울을.. 2026. 7. 25. ‘지켜봅시다’라는 말을 엄마와 나는 다르게 들었다 “지켜봅시다.” 안과 진료실에서 들은 말은 짧았지만, 차에 타서 엄마와 내가 꺼낸 말은 서로 달랐다. 엄마는 수술하자는 이야기가 없었으니 아직 괜찮은 것 같다고 하셨다. 나는 같은 설명을 듣고도 다음 예약일까지 기다려도 되는 변화와 먼저 병원에 알려야 하는 변화를 구분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급한 건 아닌가 봐.” 엄마는 안전벨트를 매며 그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운전대를 잡고도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당장 치료하지 않아도 된다는 설명은 분명 다행스러웠다. 하지만 지금 급하지 않다는 말과 앞으로도 계속 괜찮다는 말은 같지 않았다. 같은 진료실에서 같은 문장을 들었는데 엄마에게는 안심이 남았고, 나에게는 질문이 남았다. 같은 말이 두 사람에게 다르게 남았다엄마는 병원에서 검사나 수술 이야기가.. 2026. 7. 24. 이전 1 2 3 4 5 6 ··· 8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