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친구에게 들은 이야기를 꺼내신 것은 저녁 설거지를 시작하려던 때였다. 친구의 아들이 어디로 여행을 갔고,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다는 내용이었다. 엄마가 두 번째 문장을 이어 가기도 전에 나는 고무장갑을 끼던 손을 멈췄다. “그 이야기 며칠 전에 하셨어요.” 엄마는 잠시 입을 다무셨다. 내가 언제 들었는지까지 말하자 엄마는 고개를 조금 갸웃하셨다. “내가 너한테 말했나?” 얼마 전에는 유튜브에서 본 연예인의 일상 이야기를 두 번 들은 적도 있었다. 처음 들었을 때는 함께 웃었지만 같은 내용이 다시 나오자 나는 대화를 끝까지 듣지 않았다. 하루 종일 유튜브를 틀어 놓으니 내용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 아니냐고 했다. 그렇게 계속 보면 멍해질 수 있다며, 이러다 치매라도 오면 어떻게 하느냐는 말까지 덧붙였다. 엄마는 리모컨으로 화면을 끄지 않았다. 대신 방금 하려던 이야기를 더 이어 가지 않았다. 설거지를 하는 동안 주방에는 물소리만 남았다.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면 치매를 의심해야 할까
엄마가 같은 이야기를 했다는 사실은 마음에 오래 남았다. 조금 전 나눈 대화가 아니라 며칠 전에 했던 이야기를 다시 꺼낸 것이었지만, 본인은 이미 말했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셨다. 그날 밤에는 엄마가 했던 이야기보다, 내가 먼저 꺼낸 '치매'라는 말이 더 마음에 남았다. 최근에 알게 된 내용을 잊거나 같은 질문과 이야기를 반복하는 모습은 치매에서 나타날 수 있는 변화 가운데 하나다. 하지만 같은 이야기를 한두 번 되풀이했다는 사실만으로 치매라고 판단할 수는 없다. 나이가 들면서 이름이나 약속을 잠시 잊었다가 나중에 떠올리는 일은 생길 수 있으며, 피로와 수면 부족, 스트레스, 우울감, 복용 중인 약이나 다른 질환도 기억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중요한 차이는 깜빡한 일이 반복적으로 늘어나고, 그로 인해 평소 하던 생활이 어려워지는가에 있다. 그 기준으로 돌아보니 엄마는 친구와 통화한 뒤 주요 내용을 내게 설명할 수 있었고, 보고 있던 드라마의 인물 관계도 대체로 따라가고 계셨다. 시장에 갈 때 필요한 물건을 챙겼고 약을 드시는 시간도 평소 방식대로 확인하셨다. 같은 이야기를 반복한 장면은 있었지만, 그것만으로 엄마의 일상 전체가 무너지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반대로 최근 일을 계속 잊어 같은 질문을 짧은 시간 안에 되풀이하거나, 익숙한 일을 처리하기 어려워지고, 날짜와 장소를 자주 혼동하는 변화가 함께 나타난다면 단순한 깜빡함으로만 넘기지 않는 편이 좋다. 익숙한 길에서 헤매거나 돈과 약을 관리하는 일이 갑자기 어려워지는 모습, 물건을 엉뚱한 곳에 두고 지나온 과정을 되짚지 못하는 변화도 진료가 필요한 신호가 될 수 있다. 그날 이후 나는 한 장면을 엄마의 기억 전체로 확대하지 않기로 했다.
드라마 제목을 맞히게 하면 기억 상태를 알 수 있을까
걱정이 생기자 나는 엄마에게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매일 보시는 일일드라마의 제목이 무엇인지 물었고, 그 전에 방영했던 드라마 제목도 기억나는지 확인했다. 엄마는 화면을 바라보다가 제목의 앞부분만 말하고는 멈추셨다. “제목을 꼭 외워 가면서 봐야 하나? 그냥 보는 거지.” 나는 등장인물의 이름과 전날 줄거리도 물었다. 엄마가 바로 대답하지 못하면 질문을 조금 더 쉽게 바꿨고, 그래도 답이 나오지 않으면 내가 정답을 알려 드렸다. 엄마가 무엇을 기억하는지 알고 싶어서 시작했지만, 질문은 점점 퀴즈처럼 변했다. 드라마 제목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만으로 인지기능 저하를 판단하기는 어렵다. 관심 있게 보는 내용과 배경처럼 틀어 놓는 방송은 기억에 남는 정도가 다를 수 있고, 특정 이름을 바로 떠올리지 못해도 줄거리나 인물을 알아볼 수 있다. 반대로 집에서 몇 가지 질문에 잘 대답했다고 해서 문제가 없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 의료기관에서 시행하는 인지평가도 한두 가지 답만으로 치매를 확정하는 검사는 아니다. 기억과 언어, 주의력, 판단력 등을 살펴보는 검사는 추가 확인이 필요한지를 판단하는 과정이며, 실제 진단에서는 일상 기능의 변화와 병력, 복용 약, 신체 상태 등을 함께 확인한다. 간단한 인지검사 결과만으로 치매를 진단할 수 없다는 점도 알려져 있다. 엄마에게 드라마 제목을 묻던 날, 나는 답을 듣는 동안 엄마의 표정보다 맞고 틀린 것에 더 집중하고 있었다. 엄마는 질문을 받을수록 짧게 대답했고, 어떤 날에는 왜 자꾸 자신을 확인하느냐며 불편해하셨다. 그때부터 집에서 내가 만든 문제로 엄마의 기억력을 판정하는 일은 그만두기로 했다.
어떤 변화가 반복되면 진료를 받아야 할까
그 뒤에는 엄마가 기억하지 못한 단어보다 이전에 혼자 하던 일을 여전히 할 수 있는지를 살폈다. 약속 날짜를 한 번 잊었는지가 아니라 달력과 문자로 다시 확인할 수 있는지, 물건을 잠시 찾지 못했을 때 지나온 장소를 되짚을 수 있는지, 익숙한 가전제품과 휴대전화를 이전처럼 사용할 수 있는지를 보는 쪽에 가까웠다. 치매는 기억력만 나빠지는 상태를 뜻하지 않는다. 기억하거나 생각하고 판단하는 능력의 변화가 일상생활에 지장을 줄 정도로 나타나는 상태를 말한다. 최근 정보를 반복해서 잊는 것과 함께 익숙한 일을 끝내기 어려워지거나, 돈과 약을 관리하는 능력이 떨어지고, 시간이나 장소를 혼동하는 변화가 나타난다면 진료를 고려해야 한다. 말할 단어를 찾기 어려운 일이 눈에 띄게 늘거나 대화의 흐름을 자주 놓치는 모습, 판단력과 성격의 뚜렷한 변화도 함께 살펴볼 수 있다. 가족이 보기에 예전과 다른 변화가 점차 늘거나 기억 문제로 일상생활이 불편해진다면 가까운 의료기관에서 상담받는 편이 좋다. 기억력 저하는 치매 외에도 치료 가능한 원인으로 생길 수 있으므로 가족이 미리 병명을 정하기보다 의료진의 평가를 받는 것이 필요하다. 갑자기 말이 어눌해지거나 한쪽 팔다리에 힘이 빠지고, 사람이나 장소를 알아보지 못하는 혼란이 갑작스럽게 나타난다면 서서히 진행되는 기억 변화와는 다르게 봐야 한다. 이런 급격한 변화는 집에서 며칠 더 관찰하기보다 신속하게 의료적 도움을 받아야 한다.
정답을 묻지 않으니 엄마의 말이 다시 길어졌다
며칠 뒤 엄마는 텔레비전을 보다가 한 연예인의 집 이야기를 꺼내셨다. 나는 이미 전에 들었던 내용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처음과 같은 부분에서 엄마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고, 재미있었던 장면을 설명할 때에는 손짓까지 같았다. 전 같으면 “그 이야기하셨어요”라고 바로 말했을 것이다. 그날은 엄마가 말을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 “그 사람은 왜 갑자기 이사를 갔대요?” 엄마는 화면에서 눈을 떼고 나를 보셨다. 이사한 이유는 자신도 잘 모르겠다며, 대신 새로 꾸민 부엌이 얼마나 넓었는지를 설명하셨다.

이야기는 내가 전에 듣지 못했던 부분으로 이어졌다. 엄마가 한 말을 모두 처음 듣는 척할 필요까지는 없었다. 같은 이야기가 나왔을 때 “그때 그 친구 이야기지요?”라고 부드럽게 연결하거나, 기억을 확인하는 질문 대신 엄마가 느낀 점을 묻는 편이 대화를 이어 가기 쉬웠다. 틀린 내용을 바로잡아야 할 상황과 단순히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도 구분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요즘 드라마 제목 대신 등장인물 중 누가 마음에 드는지 묻는다. 유튜브에서 본 사람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을 때에는 맞혀 보라고 재촉하지 않고 어떤 장면이 재미있었는지를 듣는다. 엄마의 기억 상태가 걱정되지 않게 된 것은 아니다. 다만 걱정을 확인한다는 이유로 매일 엄마에게 시험을 치르게 하지는 않는다. 그날 엄마는 연예인의 부엌 이야기를 마친 뒤 친구에게 들은 여행 이야기로 넘어갔다. 앞부분은 며칠 전에 들었던 내용이었다. 나는 말을 끊지 않고 식탁 맞은편에 앉았다. “그래서 그 친구분은 여행이 좋았대요?” 엄마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번에는 친구가 돌아오는 길에 있었던 일을 들려주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