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대학병원 예약을 잡고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식탁 한쪽에 놓인 진료의뢰서가 다시 눈에 들어왔다.
예약은 이미 잡아두었다.
이비인후과 진료 날짜와 시간도 정해졌고 예약 문자도 휴대전화에 남아 있었다.
처음에는 냉장고 옆에 붙여둔 작은 메모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진료 날짜가 가까워지면서 예약은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집 안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냉장고 옆에서는 작은 종이였고, 식탁에서는 진료의뢰서였고, 서랍을 열었을 때는 그동안 먹었던 약 봉투였다.
전날 밤에는 그것들이 하나의 가방 안에 들어갔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에는 현관에 놓인 가방이 되었다.
처음에는 냉장고 옆 종이 하나면 충분했다
아버지는 콧물과 재채기가 계속돼 동네 이비인후과를 다니고 계셨다.
약을 먹으면 잠깐 괜찮아지는 것 같았지만 증상이 다시 나타났다.
이번에는 대학병원 이비인후과에서 진료를 받아보기로 했다.
예약을 잡은 날 나는 날짜와 시간을 작은 종이에 적어 냉장고 옆에 붙여두었다.
아버지가 그 종이를 한번 보시더니 말씀하셨다.
“그날이면 되겠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예약 날짜만 잊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침에 냉장고 문을 열 때마다 종이가 보였고 물을 마시러 주방에 왔다가도 날짜가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그때까지 그 종이는 어디까지나 날짜를 알려주는 메모였다.
아직 병원에 갈 준비를 시작했다는 느낌은 없었다.
아버지도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아침을 드시고, 운동을 다녀오고, 저녁이면 TV를 보셨다.
예약이 잡혔다는 사실이 집안의 생활을 바꾸지는 않았다.

며칠 뒤에는 날짜보다 진료의뢰서가 먼저 보였다
진료 날짜가 가까워지면서 식탁 한쪽에 놓여 있던 진료의뢰서를 다시 펼쳐보게 됐다.
처음 병원 예약을 잡을 때도 확인했던 서류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보는 이유가 달랐다.
예약 날짜가 언제인지 확인하려고 보는 것이 아니라, 실제 진료를 받으러 갈 때 가지고 가야 할 서류라는 생각이 들었다.
진료과를 다시 확인하고 날짜와 시간을 살폈다.
동네 이비인후과에서 받은 진료의뢰서라는 것도 다시 확인했다.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인데도 한 번 더 눈으로 확인하고 나니 예약이라는 것이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예약을 잡는 순간에는 병원에 갈 날짜만 정해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날짜가 가까워지자 그 날짜에 실제로 들고 갈 것이 하나 생긴 셈이었다.
진료의뢰서는 다시 접혀 식탁 위에 놓였다.
아버지가 평소 겪던 이야기도 그때그때 들었다
며칠 뒤 저녁을 먹다가 아버지가 콧물 이야기를 꺼내셨다.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심해.”
재채기는 아침뿐 아니라 식사할 때도 나온다고 하셨다.
약을 먹으면 잠깐 괜찮아지는 것 같지만 다시 증상이 나타난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휴대전화에 짧게 남겨두었다.
아버지에게 병원에서 할 말을 미리 정리해서 외우게 하지는 않았다.
“병원에서 뭐라고 말해야 돼?”
아버지가 물으셨다.
“평소처럼 말씀하시면 돼. 언제부터 그랬는지, 언제 심한지만 기억나는 대로 말씀하세요.”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셨다.
내가 해야 할 일은 아버지의 말을 대신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진료를 받을 때 필요한 것들을 빠뜨리지 않도록 준비하는 쪽에 가까웠다.
서랍을 열자 이번에는 약 봉투가 나왔다
진료 날짜가 더 가까워졌을 때 서랍을 정리하다가 아버지가 먹었던 약 봉투가 눈에 들어왔다.
약 이름을 내가 모두 기억하고 있지는 않았다.
처음에는 약 이름을 따로 적어둘까 생각했다.
그러다 약 봉투에 이미 약 이름이 적혀 있는 것을 보았다.
굳이 내가 다시 옮겨 적는 것보다 실제로 받은 약 봉투를 그대로 가져가는 편이 더 간단해 보였다.
그래서 약 봉투를 버리지 않고 진료의뢰서와 함께 챙겨두었다.
그때부터 집 안에 흩어져 있던 것들이 조금씩 같은 방향을 갖기 시작했다.
냉장고 옆의 메모는 날짜를 알려주고 있었다.
식탁 위의 진료의뢰서는 진료에 필요한 서류가 되어 있었다.
서랍 속 약 봉투는 아버지가 그동안 먹었던 약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이 되었다.
각각 따로 있을 때는 평범한 종이와 봉투였지만, 진료 날짜가 가까워지자 모두 병원으로 가져갈 것이라는 공통점이 생겼다.
전날 밤에는 흩어져 있던 것들이 가방에 들어갔다
진료 전날 밤이 되자 냉장고 옆 메모에 적힌 날짜가 바로 다음 날이 됐다.
나는 현관 가까운 곳에서 가방을 꺼냈다.
식탁에 있던 진료의뢰서를 먼저 넣었다.
그다음 약 봉투를 챙겼다.
예약 문자도 다시 확인했다.
며칠 전까지는 각각 다른 곳에 있던 것들이었다.
그날 밤에는 하나의 가방 안에 들어갔다.
아버지가 옆에서 물으셨다.
“내일 몇 시에 나가면 돼?”
“예약 시간보다 조금 일찍 가야 하니까 한 시간 전에 나가야지.”
“알았어.”
아버지는 그렇게 말씀하시고 방으로 들어가셨다.
나는 가방을 현관 가까이에 놓았다.
며칠 동안 냉장고 옆에서 날짜를 알려주던 종이가 그날 밤에는 가방 속에 들어간 서류와 연결되어 있었다.
다음 날 아침에는 메모보다 현관이 먼저 보였다
다음 날 아침은 평소보다 조금 일찍 시작됐다.
아버지는 식사를 마치고 옷을 갈아입으셨다.
현관 가까이에 놓아둔 가방을 챙겼다.
며칠 동안 냉장고 옆에 붙어 있던 작은 메모도 그대로였다.
하지만 그날 아침에는 메모를 다시 확인하지 않았다.
날짜를 확인하는 단계는 이미 지나갔기 때문이다.
진료의뢰서는 가방 안에 들어갔고, 약 봉투도 함께 들어 있었다.
휴대전화에는 예약 문자가 남아 있었다.
그리고 현관에는 병원에 가져갈 가방이 놓여 있었다.
나는 며칠 전의 집을 떠올렸다.
그때는 냉장고 옆에 붙은 작은 종이 하나만 보였다.
아직 오지 않은 날짜였다.
그 뒤로 그 날짜는 식탁 위의 진료의뢰서가 되었고, 서랍 속 약 봉투가 되었고, 전날 밤에는 가방 안으로 들어갔다.
마지막에는 현관 앞에서 아버지가 신발을 신는 모습으로 이어졌다.
예약을 잡은 뒤 특별한 일이 계속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는 평소처럼 밥을 먹고 운동을 하고 TV를 보며 며칠을 보내셨다.
그 평범한 생활 속에서 병원에 갈 날짜만 조금씩 가까워졌다.
나는 예전에는 예약을 잡으면 그 날짜를 기억하고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이번에는 날짜가 가까워질수록 집 안의 평범한 물건들이 하나씩 병원으로 향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을 보게 됐다.
어떤 진료 결과를 듣게 될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그건 병원에서 확인할 일이었다.
다만 그날 아침에는 한 가지가 분명했다.
며칠 전 냉장고 옆에 붙어 있던 날짜가 이제 현관까지 와 있었다.
아버지는 신발을 신고 계셨고, 진료의뢰서와 약 봉투가 들어 있는 가방이 옆에 놓여 있었다.
이제 그 일정은 메모 속 날짜가 아니라, 실제로 집을 나서는 일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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