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잠깐 앉는 시간이 다음 걸음을 바꿨다

by 브라보인생 2026. 8. 16.

마트에서 장을 거의 다 본 뒤였다. 카트 안에는 우유와 두부, 채소 몇 가지가 들어 있었고 계산대 앞에는 서너 명이 줄을 서 있었다. 사람이 적은 줄을 찾느라 계산대 쪽을 살피는 동안 엄마는 말없이 고객센터 옆 의자로 걸어가셨다. 작은 의자 두 개 중 하나가 비어 있었다. 엄마는 장바구니를 발밑에 내려놓고 천천히 앉으셨다. 마트 안을 오래 돌아다닌 것도 아니었다. 필요한 물건을 적어 왔기 때문에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는 채소 가격을 비교하며 카트를 직접 밀기도 했다. 엄마가 의자로 간 뒤 나는 카트를 계산대 줄에 세웠다. 줄이 한 칸씩 앞으로 움직이는 동안 엄마는 휴대전화를 보거나 벽에 기대 눈을 감지 않았다.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가만히 바라보고 계셨다. 계산을 마치고 돌아와 영수증을 접어 가방에 넣었다. 장바구니 손잡이도 한쪽으로 기울지 않게 다시 정리했다. 엄마는 그 과정이 끝날 때까지 의자에 앉아 있다가 조용히 몸을 일으키셨다. “이제 가면 돼.” 엄마는 가벼운 봉투 하나를 들었고 나는 나머지 장바구니를 챙겼다. 

 

대형마트 계산대 근처 작은 의자에 장바구니를 발밑에 두고 앉아 있는 고령의 어머니와 계산을 마친 뒤 돌아오는 중년 딸

아픈 곳이 없다는 말로는 설명되지 않았다

차에 앉은 엄마는 안전벨트를 당기고 창밖을 바라봤다. 허리나 다리가 특별히 아픈 것은 아니라고 했다. 숨이 차거나 어지러운 것도 아니었다. 잠깐 앉았다 가면 편하다는 말이 전부였다. 시장이나 마트에 가면 엄마는 중간중간 앉을 곳을 찾았다. 은행에서는 번호표를 뽑은 뒤 의자로 갔고,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이 길지 않아도 빈자리가 보이면 앉았다. 예전에는 앉을 곳이 없어도 오래 서 계셨다. 백화점에서는 아버지가 쇼핑을 마칠 때까지 서서 기다렸고, 버스 정류장에서도 자리를 지켰다. 요즘은 오래 걷지 않은 날에도 기다리는 시간이 생기면 빈 의자를 이용하셨다.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 엄마는 발목을 천천히 돌렸다. 집에 도착한 뒤에는 장바구니를 들고 현관을 지나 주방까지 쉬지 않고 걸었다. 우유와 두부를 냉장고에 넣는 모습만 보면 조금 전 마트에서 꼭 앉아야 했던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집에서는 장바구니를 들고 주방까지 걸었고, 밖에서는 기다리는 시간이 생기면 의자를 찾으셨다. 

서 있는 시간 뒤에도 걸어야 할 거리가 남아 있었다

저녁을 먹은 뒤 엄마는 식탁 의자를 뒤로 밀고도 한동안 그대로 앉아 계셨다. 식사를 마치면 곧바로 그릇을 싱크대로 옮기던 평소와 달랐다. 엄마는 물컵을 한 모금 마신 뒤 오래 서 있으면 다음 발을 떼기가 싫어진다고 했다. 통증이라기보다 다리가 무거워지고, 잠시 앉았다가 일어나면 다시 걸을 만하다고 했다. 손바닥으로 무릎을 가볍게 쓸어내린 뒤 발끝을 몸 쪽으로 당겼다가 다시 바닥에 내려놓으셨다. 계산을 마친 뒤에도 주차장을 지나 차까지 걸어야 했다. 집에 도착하면 다시 차에서 내려 현관까지 걸었다. 엄마는 긴 설명 대신 조용히 자리를 찾아 앉아 잠시 쉬었다가 다시 움직였다. 그날 저녁 엄마는 그릇을 들기 전에 잠시 더 앉아 있었다. 싱크대까지 몇 걸음 되지 않았지만 일어날 때를 서두르지 않았다. 발을 바닥에 가지런히 놓은 뒤 식탁을 짚지 않고 몸을 일으켰다.

의자에서 일어난 뒤에는 출구까지 멈추지 않았다 

며칠 뒤 다른 마트에 갔을 때 계산대 앞에는 카트가 길게 늘어서 있었다. 계산대 바로 옆에는 의자가 없었고, 조금 떨어진 휴게 공간에 빈자리 두 개가 보였다.

 

마트 휴게 공간 의자에서 잠시 쉬다가 가벼운 채소 봉투를 들고 천천히 일어나는 연세드신 엄마와 무거운 장바구니를 먼저 든 중년 딸

 

줄이 쉽게 줄지 않았다. 앞사람이 계산한 물건을 다시 확인했고 직원은 가격표가 없는 상품을 알아보러 자리를 비웠다. 엄마는 카트 손잡이를 잡은 손을 몇 차례 바꾸고 한쪽 발을 뒤로 뺐다가 다시 모았다. 엄마는 카트에서 손을 놓고 조금 떨어진 휴게 공간으로 걸어갔다. 나는 줄에 남아 계산을 이어 갔다. 계산과 짐 정리가 끝나자 나는 우유와 세제를 들고, 엄마에게는 가벼운 채소 봉투를 건넸다. 엄마는 가방 지퍼를 닫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는 계산대를 뒤로한 채 천천히 출구 쪽으로 걸어갔다. 


소개 및 문의 · 개인정보처리방침 · 면책조항

© 2026 블로그 이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