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서랍 안에 들어 있던 약봉지를 하나씩 꺼내 식탁 위에 늘어놓으셨다. 흰 봉지와 노란 봉지가 겹쳐졌고, 오래전에 받아 둔 안약과 감기약도 차례로 나왔다. “분명히 여기 있었는데.” 엄마는 봉지 안에 든 알약을 눈앞에 가까이 가져가셨다. 작은 글씨는 잘 보이지 않는다며 약 이름 대신 색과 모양을 살피셨다. 둥근 흰색 약을 들었다가 내려놓고, 조금 더 작은 약을 다시 집어 드셨다. 정형외과에서는 통증이 있을 때 드시는 약이 집에 남아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전 진료에서 필요할 때 복용하도록 처방했기 때문에 이번에는 새 약을 내지 않겠다는 설명이었다. 엄마는 그런 약을 받은 기억이 또렷하지 않았지만 버린 적은 없으니 집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한참 동안 서랍을 뒤진 끝에 안쪽에서 작은 약봉지 하나가 나왔다. 정형외과 이름과 조제 날짜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봉지 안에는 흰색 알약이 몇 개 들어 있었다. 엄마는 약봉지를 손에 든 채 물으셨다. “그럼 무릎 아플 때 이거 먹으면 되지?” 나는 봉지에 적힌 날짜부터 다시 살폈다. 처방받은 뒤 다른 약이 추가됐는지, 약이 어떤 상태로 보관돼 있었는지, 현재도 같은 방법으로 복용해도 되는지를 확인해야 했다. 엄마는 신장 기능과 위장 상태도 함께 살피고 있었기 때문에 오래된 진통제를 기억만으로 드시게 할 수는 없었다.

약보다 봉지에 남은 정보를 먼저 확인했다
엄마의 서랍에는 비슷한 흰색 알약이 여러 개 있었다. 하나는 감기 때문에 받은 약이었고, 다른 하나는 통증이 심할 때 복용하도록 처방받은 약이었다. 포장과 떨어진 알약은 어느 병원에서 받은 것인지 바로 알기 어려웠다. “이게 무릎 약 같은데.” 엄마는 약 하나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으셨다. 나는 다시 봉지 안에 넣어 드렸다. 약의 색과 크기는 기억을 떠올리는 데에는 도움이 될 수 있지만, 복용할 약을 고르는 기준으로 삼기는 어려웠다. 서로 다른 성분의 약이 비슷하게 생길 수 있고, 같은 성분도 제조사나 용량에 따라 모양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름과 처방 시기를 알 수 없는 약은 통증이 생겼다는 이유로 복용하지 않았다. 평소 드시는 약과 성분이 겹칠 수 있고, 이전 진료 이후 건강 상태가 달라졌을 가능성도 있었다. 다른 가족이 받은 진통제를 대신드리는 방법도 선택하지 않았다. 찾아낸 봉투를 식탁 조명 가까이 가져갔다. 환자 이름과 조제 날짜, 처방받은 병원과 조제한 약국이 적혀 있었다. 복용 횟수와 식사 전후의 복용 시점도 작은 글씨로 표시돼 있었다. 엄마는 돋보기를 가져와 병원 이름부터 읽으셨다. 날짜를 확인한 뒤에는 당시 무릎이 많이 아팠던 날이 떠오른다고 하셨다. 진료를 마치고 시장에 들르지 못한 채 곧바로 집으로 돌아왔던 날이었다. “그때 받은 건 맞는 것 같아. 몇 알 먹었는지는 생각이 안 나네.” 엄마는 봉투를 뒤집어 남은 약의 개수를 세셨다. 처음 몇 알을 받았는지, 마지막으로 언제 복용했는지는 기억하지 못하셨다. 봉투가 뜯어진 곳은 없는지, 알약이 변색되거나 부서지지는 않았는지, 습기가 찬 흔적은 없는지도 함께 살폈다. 포장이 손상됐거나 약의 색과 모양이 달라진 경우에는 복용하지 않는 편이 안전했다. 조제 시기를 확인하기 어렵거나 덥고 습한 곳에 오래 보관했다면 약국에 문의할 필요가 있었다. 겉으로 멀쩡해 보이더라도 현재 복용 중인 약이나 건강 상태에 따라 사용 여부가 달라질 수 있었다. 엄마는 매일 드시는 약봉투를 가져와 정형외과 약 옆에 놓으셨다. “내가 지금 먹는 약도 같이 말해야겠네.”
병원과 약국에 물어볼 내용을 한 장에 적었다
처방약을 잃어버렸거나 남은 약의 정체를 확인하기 어려울 때에는 처방받은 의료기관이나 조제한 약국에 문의할 수 있다. 다만 전화로 과거 처방 내용을 확인할 수 있는 범위와 다시 조제할 수 있는지는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었다. 처방전이 필요한 약은 약국에서 임의로 다시 내어 줄 수 없고, 의료진의 판단이나 재진이 필요할 수도 있다. 지난 처방 내역이 확인되더라도 현재 증상과 건강 상태에 맞는지는 다시 살펴야 했다. 엄마는 병원에 또 가야 할 수도 있다는 말을 듣고 표정을 찌푸리셨다. “약 몇 알 때문에 다시 진료를 받아야 해?” 곧바로 방문하기보다 먼저 전화해 보기로 했다. 메모지에는 환자 이름과 생년월일, 정형외과 이름, 조제 날짜를 적었다. 현재 복용 중인 약이 있다는 내용과 남은 약의 복용 방법을 확인하고 싶다는 문장도 덧붙였다. 엄마는 내가 적는 내용을 보다가 한 줄을 더 말해 주셨다. “무릎이 아픈 건 오늘부터가 아니고, 시장에 오래 갔다 오면 가끔 그래.” 그 말도 메모 아래쪽에 적었다. 언제부터 아팠는지, 붓거나 뜨거운 느낌은 없는지, 걸을 때 어느 정도 불편한지도 설명할 수 있도록 정리했다. 통증의 모습은 약을 찾는 일과 함께 살펴야 했다. 오래 걸은 뒤 무릎이 조금 뻐근한 정도인지, 갑자기 걷기 어려울 만큼 심해졌는지 물었다. 관절이 붓거나 붉어지고 열감이 생겼는지, 넘어지거나 부딪친 뒤부터 아픈지도 확인했다. 갑작스럽게 심한 통증이 생기거나 체중을 싣기 어렵고 붓기와 열감이 동반된다면 서랍 속 약을 찾는 데 시간을 보내지 말고 의료기관에 연락해야 할 수 있었다. 엄마의 무릎에는 눈에 띄는 붓기나 열감은 없었다. 시장을 오래 다녀온 날이면 느끼던 뻐근함에 가까웠다. 복용을 마친 빈 봉투 가운데 더 이상 확인할 필요가 없는 것은 따로 모았다. 이름과 병원·약국 정보가 적힌 부분은 잘게 찢어 처리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알약은 일반 쓰레기통에 바로 넣지 않고 지역 약국이나 보건소의 폐의약품 수거 방법을 확인한 뒤 버리기로 했다.

봉투 위에 '복용 전 확인' 이라고 적었다
다음 날 오전 엄마와 나는 식탁에 마주 앉아 약국에 전화를 걸었다. 엄마는 수화기 가까이 몸을 기울이고 내가 환자 이름과 조제 날짜를 말하는 것을 들으셨다. 약사는 봉투에 적힌 약 이름과 조제 날짜를 확인한 뒤, 현재 복용 중인 약과 신장 기능·위장 상태를 처방받은 병원에 함께 알리는 편이 좋다고 안내했다. 남아 있는 약이 당시 처방약과 같더라도 지금 그대로 복용해도 되는지는 다시 확인해야 한다는 설명이었다. 통화를 마친 뒤 엄마는 식탁 위에 놓인 흰색 알약을 한동안 바라보셨다. “모양만 보고는 먹으면 안 되겠네.” 처음 약을 찾을 때 엄마는 둥근지 작은지부터 살폈다. 이번에는 봉투를 뒤집어 병원 이름과 조제 날짜를 먼저 읽으셨다. 작은 글씨는 돋보기를 가까이 가져가 천천히 확인했다. “이건 무릎 약이라고 적어 놓는 것보다, 먹기 전에 물어보라고 써야겠다.” 엄마는 봉투 위쪽에 '복용 전 확인'이라고 크게 적은 뒤 돋보기와 함께 서랍 앞쪽에 놓으셨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알약은 작은 봉투에 따로 담았다. 서랍을 닫기 전 엄마는 남아 있는 약봉지의 병원 이름과 날짜를 한 번 더 읽어 보셨다.